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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회연혁

 

1960년-1962년(마취과의 발족)

1960년 10월 1일에 본 대학의 조교수로 착임하게되어 마취과장을 맡게 되었으나, 과가 독립되지 않아서 교실주임은 외과의 윤덕선 교수가 겸임하였다.

당시 마취과에서는 성모병원과 성요셉병원의 마취업무를 겸임하고 있었으나, 1961년 성바오로병원이 건립 중에 있어 이 병원도 겸해서 마취지원을 하게 되었으며, 그보다 수 년전에 20-30개 병상의 소규모로 개원했던 성모자애병원, 성가병원, 흑석동 성모병원, 의정부 성모병원의 마취도 지원하게 되었다. 대체로 국소마취로 수술을 하였기 때문에 전신마취가 필요한 대수술 만을 지원하였다.

1956년 11월에 창설된 대한마취과학회는 회원도 10명 내외로 미약하였으며, 회원 증가에 노력하고 있었다. 1958년에 부회장이 된 정운혁 조교수는 1960년에 학회장이 되어 마취과의 전문 분과로서의 독립에 분주하고 있었으며, 1963년에 드디어 대망의 마취과 전문의 자격시험이 실시되어 마취과의 임상과로서의 기반을 세우게 되었다.

1962년 3월에 마취과를 지원한 가톨릭의대 3회 졸업생 이승덕 선생이 수련의로 근무하게 되었으나 신병으로 1년 후 사임하였다.

육군에서 마취를 하다 제대하고 서울 적십자병원 마취과장으로 계시던 조형상 선생이 1962년 10월에 조교수로 부임하였으며, 과장이 혼자하던 밤 당직을 교대로 맡게 되었다.

 

2. 1963년-1967년(교실의 독립과 수련의의 출현)

1963년 3월에 정운혁 조교수가 부교수로 승진되고 마취과 주임교수 서리로 임명되면서 마취과학교실이 독립되었다. 또한 서울 해군병원 마취과에서 제대한 조용준 선생이 강사로서 성바오로병원의 마취과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1963년부터 마취과 전문의 고시가 시작되었으며, 정운혁 부교수, 조형상조교수가 1964년에 비로소 전문의 자격을 획득하여 마취과가 정식으로 분과하게 되었다.

1964년 6월에서 9월 사이에 육군에서 마취를 하던 이규선 선생과 강대영 선생이 강사로 부임하여, 각각 성모병원과 성요셉병원에 근무하면서 3교대의 당직을 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육군에서 제대한 최주영 선생이 이승덕 선생이래 마취과의 수련의로는 두번째로 수련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실질적인 우리과 최초의 수련의 과정을 밟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스텝과 수련의의 지원자가 전혀 없던 시절이라 많은 수술환자 소화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니, 연구 방면에는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손을 뻗칠 수가 없었다. 이 당시에는 다른 대학의 사정도 대동소이하였다.

기관내 마취, 근육이완제, 할로탄의 도입 등 우리나라에 새로운 현대마취를 도입하여 수술 사망률을 획기 적으로 감소시키는데 노력을 다했다. 매년 수련의사를 모집했으나 전혀 지원자를 확보하지 못하였다.

1965년 정운혁 부교수는 코펜하겐에 마취과 연수교육 이수 차 2주간 출장하였으며, 1966년에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제 2 회 아세아, 호주 마취과 학회에 참석하여 국제교류를 시작하였다.

1967년 6월에 윤덕선 외과 주임교수의 협조로 인공호흡기도 한 대 구입하여 8병상의 중환자실을 설치함으로서 중환자치료에 새 국면을 열었으나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3. 1968년-1972년(초기의 발전-수련의의 증가)

1967년 12월에 이상춘 선생이, 1968년 3월에 박숙자 선생이 각각 1년차 수련의로 입국하였으나, 1985년5월에 필동 성심병원이 개원하면서 조형상 부교수가 전출하게 되어, 본원의 마취과는 과장과 1년차 이상춘,박숙자 3명으로 난국을 밀고 나가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1969년 3월에는 신장이식 수술이 시작되었고, 1969년 4월에 가톨릭의대 출신으로는 두번째로 김성년 선생이 수련의로 입국하였고, 그 해 5월과 6월에는 수련의인 이병시 선생과 윤명자 선생이 각각 국립의료원에서 전입하여, 전보다는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나 수련의들의 고생은 여전하였다. 그래도 초독회는 꾸준히 지속해 나갔다.

1) 최주영 선생과 성바오로병원
1962년 개원이래 5년간 본원에서 수련의 파견에 의해 격일제로 지원을 하던 중, 1968년 9월에 본원에서 수련을 마친 최주영 선생이 전문의 과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야간 수술의 당직문제는 이후 만 10년간 난 문제로 지속되어, 그 간의 최주영 과장의 노고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오늘날의 성바오로병원의 마취과 발달사는 최주영 과장의 희생과 인내의 소산인 것이다.

1980년 3월에 이종무 강사가 발령되었으나, 그 해 11월에 사직하였고, 1981년 2월에 정병연 외래강사가,1983년 3월에 조성두 강사와 유건의 강사대우가 발령되었으나, 1984년 9월에 조성두 강사는 사직하였고,1985년 3월에 한경덕 강사가, 5월에는 이병호 강사가 발령되어 최주영 과장을 돕게 있다.

2) 진수남 선생과 성빈센트병원
1969년 3월에 진해 해군병원 마취과장이었던 진수남 선생이 제대하여 강사로서 성빈센트병원의 마취를 담당하게 되었으나, 진수남 선생 역시 혼자서 모든 고충을 견디어 내야만 했고, 1983년 이도용 선생과 임용걸 선생이 강사로 배치될 때까지 어려운 시절이 10여년간 계속 되었다. 1984년 6월에 이도용 강사가 사직하였으며, 1985년 민영효 선생이 임상강사로 발령되어 진수남 과장을 돕고 있다.

1969년 9월 1일에 해군에서 제대한 전세웅 선생이 조교수로 성모병원에 착임하니 마취과의 활동은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

1970년 9월에는 호주에서 개최된 제3회 아세아ㆍ호주 마취과학회, 1971년 2월에는 영국의학회 시찰을 위해 정운혁 교수가 출장하여, 경막외 마취법과 중환자관리에 관한 정보를 갖고 귀국하였다. 그동안 중환자실은 신경외과 중환자실이 1971년 1월에 분리해 나갔다.

1971년에는 조 정, 임문규, 유지섭 선생이, 1972년에는 전일곤 선생이 입국하게 되어 수련의는 6명이 되었으나, 본원과 분원을 지원하기에는 부족하였다. 1972년부터 6개월씩의 수련의 무의촌 파견으로 2명씩을 차출하게 되니 다시 마취과의 업무부담은 늘어났다. 그러나 마취과 의사의 부족은 지방에도 있었으며, 이미 본 마취과에서는 1968년부터 강원도 산간 취약지구인 장성 석곡병원에 수련의 이상춘 선생, 김성년 선생이 1-2년씩 그 곳의 마취과를 지원하였고, 계속 정태호, 김병찬, 황호식, 김세훈 선생 등의 무의촌 파견이 이를 이어 나가도록 조치되었다.

1973년부터 1975년까지 3년 사이에는 수련의가 각 3, 4, 5명으로 입국 수가 약간 증가하였으나, 수술환자가 계속 늘어나는 성모병원, 성바오로병원, 성가병원, 흑석동 성모병원 등 서울시내 4개 병원의 마취를 담당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하였다. 수련의들은 본원당직 이외에도 분원의 당직을 지원해야 했기 때문에 1개월에 20일 이상의 당직 근무를 해야만 했다.

3) 이상춘 선생과 마취과 개업의 길
1971년 본원 강사이던 이상춘 선생은 서울에서 마취과 개업을 하겠다고 용감하게 사임하였다.
마취과 의사가 언젠가는 대학병원, 종합병원에서 개업가로 진출하여야 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임에 틀림없었으나, 단지 시기가 문제였다. 본원의 마취과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램이었다.

그러나 개업도 시기가 있다. 대구, 부산, 광주 등에서는 이미 4-5년 전부터 마취과 의사의 개업활동이 시작되었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서울시내에는 마취과 전문의가 독립적으로 개업하지 못하고 있었다. 각종 악조건을 무릎쓰고 과감하게 밀고나가 서울에서 마취과 개업의 기반을 구축한 이상춘 선생의 용기와 패기에 감탄할 뿐이다. 그 후 유지섭, 박호상, 최학수, 김우식, 김병찬, 김갑성, 박경웅 선생 등이 뒤를 이어 개업가의 마취를 위해 진출해 나갔다.

1974년 여의사로서는 두번째로 성모병원에서 수련을 마치고 전문의가 된 임문규 선생은 여자교원 자리가 차 있어서 교실을 떠나 남부시립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그 후 동부시립병원을 거쳐 현재는 취약지구인 성남시 양친회병원에 마취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4. 1973년-1979년(분원 마취과의 정비 개시)

분원의 마취과를 발족하기 위해서는 본원의 마취과가 확립되는 것을 기다린 후 서서히 한 병원씩 확충해 나갈 생각이었으나, 분원의 절박한 사정은 본원에서 불규칙하게 인원을 파견할 수 밖에 없어 본원의 마취업무의 정상활동이 지장을 받음으로 본원의 마취과 정비가 마지막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말해, 본원의 마취과는 명실공히 모병원의 기능을 해야 했다.

1) 성 요셉병원
성모병원의 제 1 부속병원으로 운영되던 성요셉병원에 1960년 10월부터 정운혁 조교수가 착임이래 마취를 지원해 왔으며, 한때는 이순원씨가 마취를 담당하기도 했다. 1964년 6월부터 67년 3월까지 이규선, 강대영강사가 6개월씩 교대로 담당하였으나, 두 분 모두 싱가포르로 전출하였다.

1967년 3월부터 68년 2월까지 신정순 임상강사가, 68년 3월부터 8월까지 최주영 임상강사가, 68년 8월부터 71년 3월까지 박승자 강사가, 71년 4월부터 73년 2월 28일 본원에 흡수될 때까지 홍성완 임상강사가 담당함으로서 13년간의 요셉병원 마취지원 업무는 끝났다.

2) 송희선, 박숙자 선생과 흑석동 성모병원
1971년 송희선 선생이 흑석동 성모병원에 가게 되어, 본원에서 마취지원하는데 큰 애로사항이 해결되었으나, 1973년 전북대학 마취과 창설의 꿈을 안고 내려가게 되어, 다시 마취과장 후임 인선에 문제가 생겼다.

그 후 박숙자 강사가 1974년부터 담당하던 중 1977년 2월부터 10개월간 스웨덴에 가게 되어, 본원에 있던 유지섭 강사가 그 공백을 메워야 했다.

다시 박숙자 강사는 1978년 12월 1일 포항성모병원으로 내려가게 되니, 유지섭 강사가 뒤를 이어 1980년 2월 흑석동 성모병원이 성모병원에 흡수될 때까지 근무하다 개인병원이 된 흑석동 성모병원에 남게 되었다.

3) 박승자, 한영문 선생과 성가병원
1970년 정릉 길목에서 미아삼거리로 신축이전하자, 성가병원도 마취의 수요가 대폭 증가하여 간호원 수녀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니 본견적인 마취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1971년 독일에서 마취를 하다 귀국한 홍성완 선생이 성 요셉병원에 오게 되어, 그 곳에 있던 박승자 선생을 성가병원 마취과장으로 배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미국으로 떠나게 되는 1973년까지 만 4년간을 여자의 몸으로 밤낮없이 성가병원을 지켜주었다. 그 노력은 성가병원의 발전은 물론 본원 마취과 운영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박승자 선생의 사임으로 성가병원 마취과는 다시 공백이 되었다. 본원에서 한영문, 박숙자 두 강사와 수련의인 이종무, 박철주 선생을 교대로 보내며 명맥을 유지해 나갔으나, 보내는 측이나 받는 측이나 불편은 막심했다. 결국 한영문 선생이 성가병원에 가기로 하고, 당직만은 본원에서 지원한다는 조건으로 1974년에 성가병원 마취과는 되살아났다.

받을 여력도 보낼 사람도 부족한 상태로 10여년을 끌다가 1983년 부천으로 이사하게 되니, 한영문 선생은 의정부 성모병원으로 전출되고, 성모자애병원에 있던 이철우 강사가 1984년 3월에 과장으로 뒤를 이었다.

1984년 3월 이철우 가사가 조교수대우로 되었고, 1985년에 김영택 강사대우가 배치되고 1명의 수련의도 파견되니, 10수년 만에 기반을 잡게 되었다.

4) 전일곤, 황호식 선생과 성모자애병원
서울과 인천 사이에 있는 이 병원은 지역적으로 보아 중요한 병원이며 수술환자도 많다. 마취지원 요청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해군 위생병 출신의 김문상씨가 마취를 하던 중 1975년 마취과의사로 교체해야 할 시기가 왔다.

수련의 1명씩을 3개월 교대로 보내다가 어떤 시기에는 중단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있었다. 한때 노약우의무원장이 "본원에는 그래도 2명의 수련의가 있지 않는가, 수술은 그만 둘 수 없으니, 비상수단이라도 써야하지 않는가"고 간청해 온 일이 생각난다. 하여튼 본원은 아이들 많은 가난한 가장같이 어쩔줄을 몰랐던 때를 지나면서 1976년에 전일곤 강사를 보내게 되어 겨우 마취과 발족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3년 후 전일곤 강사가 개업을 하게 되어 또 수개월의 공백기간은 수련의 파견으로 이어나갔다.

1979년 황호식 강사가 부임하게 되니 그때부터 성모자애병원 마취과는 다시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81년 신병으로 수술을 받게 되어 일시 회복하였으나, 재발을 거듭 재수술을 수차례하여 병마와 싸우면서 과를 이끌어나가고 있으며, 1986년 이기영 강사가 차석으로 부임하여 수련의 2명과 함께 운영 중이다.

1975년에 비로소 분원에 한 명씩의 수련의를 고정시켜 2-3개월의 단위로 교체를 하기 시작하였으며, 1주일에 한 번씩 전 교실원이 본원에 모여 합동 초독회를 하고 있었으나, 수술이 폭주하여 참석치 못하는 수련의가 적지 않았다.

1977년부터는 본 대학 출신 전문의가 대전과 포항 성모병원에 까지도 마취과장으로 배치되었다.

5) 정태호, 김성년 선생과 대전성모병원
1969년 대전성모병원이 개원하자 또 다시 마취과 의사의 요구가 왔다. 1975년부터 1명의 수련의 파견은 그래도 가능했으나, 지리적 여건상 전문의의 배치는 난제였다.

1977년 3월 1일 정태호 선생이 초대과장으로 임명되어 근무하던 중, 가정사정으로 상경하게 되니 다시 후임인선이 어려워졌다. 대전성모병원의 규모로 보나, 입지조건으로 보아 마취과 없이는 운영이 않된다. 충남대학은 발족한지 얼마 안되어 근처에서 지원받을 길도 없는 불모지였다. 희생을 강요시키면서 김성년 선생에게 당분간 맡아달라고 하였으나, 교체자가 나오지 않아 만 7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1982년 3월에 성모병원에서 수련을 마친 강준구 선생이 전임강사로 배치되어 김성년 선생을 돕게 되어, 1983년 5월에 전북대학에서 수련을 마친 정석구 선생이 임명되어 대전성모병원의 마취과도 기반이 다져지게 되었다.

1983년 5월 김성년 부교수 후임으로 강준구 조교수가 마취과장 업무를 맡게 되었다. 1984년 4월 정석구선생이 사임하였고, 1985년 3월 윤건중 선생이, 1986년 5월 송윤식 선생이 각각 발령되었으며 수련의 1명이계속 파견되고 있다.

6) 최학수 선생과 포항성모병원
1977년 6월 3일 포항성모병원이 개원하자 그 곳에서도 마취과 지원을 요청해왔다. 처음에는 부속병원이었으며, 지리적 요건으로 보아 마취과 의사의 파견이 어려웠다. 1978년 최학수 강사가 마취과장으로 부임하였고, 그 해 12월 박숙자 강사가 뒤를 이었으며, 1980년 2월 자매병원으로 개편 되면서 사직하여, 외래 조교수로 근무하였다.

1983년부터 1년간 박철주 강사가 지원 파견되었으며, 1984년 3월에 박숙자 선생이 사임하자 이 해에 전문의가 된 민경신 선생이 마취과장으로 부임하여, 현재 외래 강사로서 단신으로 많은 환자를 맡고 있다.

정운혁 교수는 1973, 77, 78, 79년에 각각 일본 마취학회에 참석하였다. 특히 1973년 일본 오까야마에서 열린 제20회 일본 마취학회에 초청된 것은, 한일 마취과학회 간의 교류 창구역할을 부탁 받은 것이었으며, 나중에 1979년 제1회 한일 마취과 합동 심포지움이 개최되는 실마리가 되었다.

1978년에 전세웅 부교수가 교수로 승진하고, 4월부터 3개월간 일본 오사까대학에서 심장수술 마취를 연수하여, 귀국 후 본원에서 개심술 마취를 시작하였다. 한편 신장이식수술은 이 시기에 본 궤도로 오르고, 면역학적 연구가 상당히 진전되어 성공률도 높았으며, 마취과에서의 중요검사법인 혈액가스분석이 차차 본격화해갔다.

 

5. 1980년-1985년(강남성모병원 개원과 가톨릭대학 마취과학교실 기초 완성기)

1980년에 강남성모병원이 개원되자 본원에서 전세웅 교수와 그 해에 제대한 박철주 강사, 2명의 수련의가 전출하게 되니, 또 한차례의 인원부족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1980년 2월 28일에는 흑석동 성모병원이 본원으로 흡수되어 본원의 부담이 일부 감소되었으나 큰 변화는 없었다.

이제는 성모병원과 창설된지 얼마안된 강남성모병원이 모체가 되어 합동해서 지원해야할 분원은 대전성모병원과 의정부 성모병원이 늘어나 7개 병원인데 비해, 수련의는 매년 7-8명의 요구에 2-5명만이 입국하고 있었으므로 여전히 인원이 부족한 상태였다. 특히 연말의 전문의 고시기간 동안에는 동기방학 환자의 폭주와 겹쳐져 어려운 기간을 경과하였다.

1980년에 들어서자 성모병원의 개심술환자도 증가되어 개심술 마취에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이러는 동안에 1982년 3월 1일에 문세호 강사대우가 발령되어 성모병원은 2명의 전문의와 4명의 수련의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1983년 3월에 정동석 강사대우와 변성환 강사대우, 그 해 5월에 최장식 강사가 임명되어 성모병원 마취과의 기본인원이 차차 충원되었다. 이 해 11월 변성환 강사가 사직하였고, 1985년 3월에 이종호 강사대우, 1986년 5월에 최성철 강사가 착임하니 오랜만에 본원 마취과는 정상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강남성모병원 마취과에 1981년 1월 1일 서재현 강사가 발령되고, 82년 3월에 심재용 강사대우가, 83년 5월에 권오경 강사가, 84년 5월에 박종민 강사가 각각 발령되었다.

1983년 이래 신장이식 수술은 본거지가 강남성모병원으로 이동하였으며, 또한 강남성모 병원에서는 전세웅 교수 지도하에 근육이완제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어 나갔다.

1985년 2월에 전세웅 교수가 한양대학 마취과 주임교수로 전출하였고, 김성년 부교수가 후임 마취과장으로 부임하니 강남성모병원의 마취과는 초창기를 지나 새로운 전환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1985년 10월부터 6개월간 박철주 전임강사가 일본 기시와다시에 있는 가다병원에서 동통관리를 연수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아직 중환자관리, 동통관리, 방면에의 활동은 미약한 상태이다.

지난 25년간 마취과는 본원이 모체가 되어 임상마취의 도입과 발전에 힘써왔다. 이제는 임상적인 활동을완성시켜 나가면서 학술적인 발전을 시작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6. 발전기(1980년부터-1990년까지)

1980년에 강남성모병원이 개원되자 본원에서 전세웅 교수와 그 해에 제대한 박철주 강사, 2명의 수련의가 전출하게 되니, 또 한차례의 인원부족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1980년 2월 28일에는 흑석동 성모병원이 본원으로 흡수되어 본원의 부담이 일부 감소되었으나 큰 변화는 없었다. 이제는 성모병원과 창설된지 얼마 안된 강남성모병원이 모체가 되어 합동해서 지원해야할 분원은 대전성모병원과 의정부 성모병원이 늘어나 7개 병원인데 비해, 수련의는 매년 7-8명의 요구에 2-5명만이 입국하고 있었으므로 여전히 인원이 부족한 상태였다.

1980년 들어서자 성모병원의 개심술환자도 증가되어 개심술 마취에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이러는 동안에 1982년 3월 1일에 문세호 강사대우가 발령되어 성모병원은 2명의 전문의와 4명의 수련의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1983년 3월에 정동석 강사대우, 변성환 강사대우, 그 해 5월에 최장식 강사가 임명되어 성모병원 마취과의 기본인원이 차차 충원되었다. 이 해 11월 변성환 강사가 사직하였고, 1985년 3월에 이종호 강사대우,1986년 5월에 최성철 강사가 착임하니 오랜만에 본원 마취과는 정상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강남성모병원 마취과에 1981년 1월 1일 서재현 강사가 발령되고 82년 3월에 심재용 강사대우가 83년 5월에 권오경 강사가, 84년 5월에 박종민 강사가 각각 발령되었다.

1983년 이래 신장이식 수술은 본거지가 강남성모병원으로 이동하였으며, 또한 강남성모 병원에서는 전세웅 교수 지도하에 근육이완제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어 나갔다.

1985년 2월에 전세웅 교수가 한양대학 마취과 주임교수로 전출하였고, 김성년 부교수가 후임 마취과장으로 부임하니 강남성모병원의 마취과는 초창기를 지나 새로운 전환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1985년 10월부터 6개월간 박철주 전임강사가 일본 기시와다시에 있는 가다병원에서 동통관리를 연수하고 귀국하였다.

1987년에 최주영 교수가 대한마취과학회 서울지부장에, 김성년 부교수는 학술이사에 피선되었고, 페터교수(유타대학)의 특강 및 제 1회 대한통증학회가 강남성모병원 임상강의실에서 있었다. 서재현 조교수는 일본 동북대학에서 중환자관리에 대해 6개월간 연수를 떠났으며, 정동석 전임강사는 미국 UCLA에서 1년간 연수차 출국하였으며, 정운혁 교수는 대한구급의학회 이사장으로 취임하였고, 1988년 2월에는 박종민 조교수가 뇌신경마취 연수차 Glasgow 대학으로 떠났으며, 5월에 최주영 교수가 20년 근속상을 받았고, 김성년 부교수가 미국 피츠버그 대학으로 간이식 마취 연수를 위해 떠났다. 1989년 2월에, 권오경 조교수가 일본 동복대학에서 중환자관리연수차 출국하였으며, 이철우 조교수는 미국 다트마우스 대학에서 동통관리 연수차 출국하였고, 이병호 조교수는 미국 USC 대학으로 심장마취 연수차 출국하였다. 8월에는 문세호 조교수가 미국 남가주 대학으로 소아마취 및 중환자관리 연수차 출국하였다. 1990년 6월에는 대학원 강의실에서 본 교실 주최로 대한구급의학회 학술대회를 개최하였으며, 8월에는 김성년 교수가 미국 피츠버그대학에서 6개월간의 간이식 마취를 위한 연수를 마취고 귀국하였으며, 9월에 피츠버그대 강유구 교수의 coagulopathy에 관한 특강이 있었다. 12월에는 이종호 전임강사가 필라델피아의 Thomas-Jefferson 대로 연수차 출국하였다. 1991년 2월에는 전문의 6명이 배출됨과 동시에 길기진 전임강사와 정병연 조교수가 사직하였다.

 

7. 도약기(1991년부터 현재까지)

1991년 3월에 김태관 전강대우, 김희순 임상강사와 신미영 임상강사가 각각 대전성모, 성모, 성바오로병원으로 신규 발령 받았으며, 정운혁 교수는 일본 오오사카에서 열린 일본마취과학회에서 "한국마취과현황"에 대해 특강을 하였다. 또한, 임용걸 조교수는 미국 USC로 1년간 유학을 떠났으며, 심재용 조교수는 일본 히로사키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5월에는 정운혁 교수가 30년 근속표창을 받았으며, 최주영 교수의 회갑축하 모임이 있었다.

또한 연구용 Physiograph를 도입하여, 근육이완제의 연구 및 심장근육의 연구에 기본도구가 되었다. 8월 31일자로 김승록 전강과 김대호 전강이 사직하였다. 9월 1일에는 강남성모병원에 통증치료실이 개설되었으며, 11월에는 대한통증학회 학술대회 및 총회 개최가 본 교실 주관으로 강남성모에서 개최되었다. 9월 및 12월에 이돈성 동문(7회)의 특강 및 이사하라 교수(일본 히로사키의대)의 특강이 각각 "척추수술마취" 및"ICU와 Blood glucose"라는 제목으로 있었다. 1992년 10월에 최종호 선생이 간이식 준비를 위하여 미국 피츠버그대로 단기연수를 다녀왔으며, 고속가온 혈액주입기의 도입과 혈액응고 감시기를 들여와, 간이식 마취준비를 하게 되었다. 또한 권오경 부교수가 심장이식마취를 준비하기 위하여, 미국 시애틀로 단기연수를 다녀왔으며, 유건희 조교수는 미국 연수차 출국하였다. 1993년 6월 22일, 가톨릭 중앙의료원의 개원이래 첫 번째간 이식을 성공리에 마친 바 김성년 과장의 주도하에 강남성모 병원의 마취 진료진의 헌신은 놀라운 것이었다.

1994년 2월에는 권오경 부교수가 심장이식마취 단기연수차 미국 스탠포드대로 출국하였으며 2월 20일에는 성모병원에서 심장이식을 시행하였다. 2월 27일에는 간이식 마취연구회의 창립이 있었고, 본 교실에서는 최종호 전임강사와 김은성 전임강사가 창립 멤버로 참가하였다. 4월에는 성춘호 조교수가 미국 연수차 출국하였으며, 6월에는 성모자애병원의 통증치료실이 문을 열었으며, 7월에는 성가병원 수술실의 증축이 있었다. 9월 1일자로 이병호 부교수가 성바오로병원 마취과장으로 취임하였다.

1995년 3월에 김선철 전임강사, 이영우 전강대우, 김종분 임상강사, 정현주 임상강사, 최선희 임상강사등이 신규 임용되었으며, 최용우, 윤건중 조교수가 해외 연수차 출국하였다. 또한 문동언 조교수와 김대우 조교수 및 서재현 부교수가 해외연수를 떠났다. 반포회관에서 입국식과 함께 교실동문회의 창립이 있었으며, 유지섭 동문을 초대 회장으로 선출하였다.

5월에는 뉴저지대의 최영국 교수가 미국의 통증의학에 관한 특강이 있었으며, 8월에는 최종호 조교수가 워싱턴대로 연수차 출국하였으며, 이승균 조교수는 연변대로 연수를 떠났다. 9월에는 교실동문 체육대회가 미사리에서 열렸으며, 11월에는 강남성모병원의 통증치료실이 확장 이전하였다. 1996년 2월 28일자로 김선철 전강, 옥광익 전강, 서미애 전강, 최선희 임강이 사직하였고, 김창재 전강, 박수석 전강, 박규호 전강, 장연임가, 정은용 임강, 전연수 임강, 김영진 임강 등이 신규 임용되었다.

8월에는 송호경 조교수가 미국 연수를 떠났으며, 8월 23일에는 최주영 교수의 정년 퇴임식이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에서 있었다. 1997년 한인수 전강, 이재민 전강, 김창성 전강, 장연 전강대우, 전연수 전강대우, 정은용 전임강사, 양내윤 전임강사, 지승은 전임강사 등이 신규 임용되었으며, 6월에는 김은성 조교수가 연수차 미국 워싱턴대로 출발하였다.

1999년 3월에는 이윤기 조교수가 미 듀크의대를 연수차 떠났으며, 12월에는 최진환 조교수가 연수차 미국으로 출국했으며, 2000년 8월에는 이재민 조교수, 김창재 조교수가 연수차 미국으로 떠났다.

성모병원에서는 마취제 및 마취중에 사용하는 약제 및 기법이 순환계 및 내분비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것을 주로 연구하고 있으며 강남성모병원에서는 마취와 연관된 순환계에 대한 영향과 기억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연구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근이완제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으며, 새로이 통증과 연관하여 성상신 경절차단이 내분비계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고 있다. 그 외에도 부위마취에 대한 영향을 연구하고 있으나 아직 연구실의 기자재가 부족한 상황이라 이를 계속 보강하고 있다.

성바오로병원에서는 심장마취와 경막외마취에 따른 혈역학적 변화, PCA를 이용한 약제종류에 따른 수술후 통증관리, 심장마취시 TEE를 이용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강남성모병원에서는 1998년 최종호 교수가 피츠버그에서 간이식마취를 연수하고 온 뒤로 간이식수술이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2001년 이재민 교수가 연수에서 귀국하여 간이식마취에 합류하면서 더욱 활성화되었으며 생체 간이식이 증가하면서 박철수 교수가 합류하였다.
2000년 김의숙 선생이 촉탁의로 있던 자애병원에서 성가병원 펠로우로 옮겼다. 이때 성가병원은 통증치료실을 2층 외래로 독립된 공간을 확보하여 진료를 시작하였다. 대전성모병원에서는 임정혁, 이명우 선생이 사임하고 후임으로 이상묵, 이미정 선생이 부임했다.

2001년에 유주현 선생이 성모병원, 주진덕 선생이 빈센트병원, 변형진 선생이 자애병원에 임용되었고 오세철선생이 사직한 박규호 선생 후임으로 대전에 임용되었다. 김창성, 양내윤 선생이 강남성모병원에서 한석호 선생이 부천성가병원에서 퇴직하였다.
2000년 성가병원에서는 병원 설립 시부터 과의 발전을 위해 18년간 과장직을 수행하던 이철우 교수가 과장직을 사임하고 한인수 전임강사가 과장서리와 과장을 2년간 하고 김태관선생으로 이어졌다. 마침 그때 부천성가병원의 김애라 선생이 자율평가시험에서 1위를 하였다.
2002년에는 대전성모병원에서 김경희, 이미정 선생이 사임하고 손윤숙, 조현숙 선생이 임용되었고 김의숙 선생이 부천성가병원에 송수경, 김태현 선생이 강남성모병원, 최진우 선생이 빈센트병원, 김대영 선생이 성모병원, 성모병원에 있던 유주현 선생이 자애병원, 김병삼 선생이 강남성모병원에 임용되었다. 같은 해에 의정부성모병원의 박현숙 선생과 강남성모병원의 송수경 선생이 퇴직했다. 이때부터 전공의 모집이 각 병원 모집에서 총정원제모집으로 전환되어 향후 5년간 시범 병원으로 지정되었다 그 결과 청주성모병원이 새로 편입되어 총 16명의 전공의를 모집하여 각 병원으로 할당하는 제도가 시행되었다. 본원과 수도권을 제외한 부속병원들은 전공의 확보에 어려움이 많았었는데 좀 수월하게 되었으나 확보된 전공의의 배정에 원하지 않는 병원으로 배치된 전공의들은 불만이 없을 수 없었고 이는 아직까지도 뚜렷한 해결책이 없는 실정이다.
2003년에는 조현숙, 손윤숙 선생이 대전성모병원에 김병삼, 장혜원 선생이 강남성모에 임용되었고 김태현, 이미정 선생이 퇴직했다.

총정원제로 뽑은 수련의 중에 처음으로 청주성모병원에 파견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2004년 의정부성모병원이 증축하였다. 성가병원에서 양경승 선생이 자율평가 시험에서 1등을 하였다. 윤재원, 양소영, 박철수선생이 강남성모병원에 임경실, 이재명 선생이 의정부성모병원에 정규돈 선생이 대전성모병원에 임용되었고 김종열 선생이 대전성모병원을 사임하였다.
2005년에는 문호식 선생이 성모병원에 임용되었다 이때부터는 마취과 스태프의 자리도 거의 차서 교수요원으로 임용되기 전 반드시 펠로우를 거쳐야 했고 스태프 자리는 있으나 지원요건을 맞추지 못한 선생들이 거쳐 가는 직위가 되었으나 통증 펠로우는 1년간 통증크리닉에서만 근무하고 나가는 선생들이 지원하게 되어 인기가 많아서 각 병원에 통증펠로우들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0월 7일에 강남성모병원에서는 새 병원과 성의회관 기공식 거행하였다. 대전성모병원이 증개축하여 수술실도 10개가 늘어낫고 통증크리닉의 환자증가로 전임의와 전문의도 3명으로 증가하였다.

2006년에는 박휴정 김시현 김원영 선생과 박정주, 박승재 선생이 강남성모병원에 박훈 선생이 의정부성모에 근무를 시작하였다. 이 해에 법적인 표방과명이 마취통증의학과로 개명되었다. 대전성모병원이 새로운 외래공간을 확보하면서 통증센터로 개설하게 되었다. 통증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대부분의 전공의들은 통증을 배우고 싶어 마취과를 선택하게 되었고 경쟁률도 높았었는데 병원 배정에 항상 불만이 있어 교육정원 제가 생겼다. 이는 내부적으로 원래 T/O와 관계없이 교육받고 싶은 병원에 지원을 하면 받아서 교육을 시킨후에 배치하는 일종의 보완책이었다. 그 결과 지원이 몰리는 병원과 지원을 하지 않는 병원이 생겨서 지원이없는 병원은 교육병원에서 반수에 해당되는 인력만 파견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2007년에는 전준표, 홍상현,강승희, 김대영 선생이 강남성모병원에, 김진서 선생이 자애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하였다.
2008년에 정홍수선생이 빈센트병원, 김정은, 문영은, 심진철, 이동욱, 양경승 선생이 강남성모병원에 임용되었다. 성모병원의 최진환 조교수와 김대영, 윤종현, 이지영 선생이 퇴직하였다. 7월에는 성모자애병원이 경영 재단이 인천교구로 바뀌었고 인천성모병원으로 변경되었다.
2009년에는 임수진, 전순신, 주진, 황원정, 이민혜, 김영훈, 김용석, 정현식, 김병삼 선생이 서울성모병원에 임용되었다. 성가병원이 서울성가소비녀회에서 학교법인 가톨릭학원으로 변경되면서 부천성모병원으로 개명되었다. 대전성모병원은 그 동안 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윤건중 과장이 사임하고 후임에 이상묵 선생이 임명되었다. 총정원제가 유리 하다고 판단한 의료원에서 앞으로 다시 5년간 총정원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하면서 창원 파티마 병원이 새로 편입되어 2010년부터 파견하게 되었다. 전공의 모집이 교육정원제로 폐단이 있어 교육정원제를 시행하지 않고 다만 지원이 없는 병원인 청주성모와 창원파티마 병원만 서울 성모병원에 교육정원으로 하여 6개월 교육 후 파견하는 것으로 하였다. 그 결과 청주성모병원과 창원파티마병원은 초반 6개월은 1년차 파견이 없이 지내야 했다. 2010년에는 이한숙, 배현민, 조은정, 조수민, 김윤주 선생이 서울성모병원에 이정혁 선생이 의정부성모에 박수경, 강성희 선생이 인천성모병원에 이정아 선생이 빈센트병원에 임용되었다. 각 부속병원들이 규모가 커지면서 수술의 종류도 다양해져 이식수술, 심장수술 등이 각 병원에서 새로 시작하여 대전성모병원은 이미 200?년에 신장이식수술 이 200예를 넘어섰고 2010년에는 간이식을 시작하게 되어 서울성모병원과 마취에 관한 협진이 필요하였다 이어서 인천성모병원에서도 심장수술이 시작되어 서울성모병원과 여의도성모병원에서 협진 지원으로 시범 진행하였다.

1980년도에 세워진 강남성모병원이 확장의 필요성에 따라 드디어 2003년 가톨릭대학교 새병원 건립추 진본부가 발족하여 2004년에 CM사 선정 2005년에 기본설계 완성하여 건축심의를 획득하고 2009년 완공 개원하여 3월부터 진료를 시작하여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2010년 3월 새 병원을 서울성모병원으로 하고 성모병원은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개명하였으며 새 병원으로 이전하면서 새로운 교수진이 대거 영입하게 되었다. 서울성모병원은 1999년 8월부터 권오경 교수가 박철주 교수의 뒤를 이어 과장으로 역임하였고 2005년 3월부터는 박종민 교수가 2007년부터는 문동언 교수가 과장직을 맡고 있다. 주임교수는 2005년 3월부터 박종민 교수가 현재까지 맡고 있다. 학회 활동도 활발하여 서울성모병원의 박종민 교수가 마취과학회 이사장에 문동언 교수가 통증학회 회장에 유건희 교수가 마취과학회 서울 지부장에 당선되어 2010년부터 임기가 시작되었다. 바오로병원의 이병호 교수는 중환자학회 회장을 역임하여 세부전문의 제도 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2009년 대한중환자의학회가 여러 과가 참여할 수 있는 세부전문의제도를 시행하여 우리 대학에서도 많은 선생들이 중환자 세부전문의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서울성모병원의 최종호 교수는 새 병원 중환자실장으로 근무하기 위하여 3개원 간 중앙병원, 세브란스병원 등을 돌면서 중환자관리에 대한 준비를 하여 2008년부터 실제로 중환자실장을 맡아 새 병원이 생긴 뒤에도 열심히 중환자 관리를 하였으나 미완의 협조와 인력으로 2010년 실장을 사임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도 있었다.

의무기록 전산화 작업이 강남성모병원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져 2008년 최초로 구축된 뒤 여의도성모, 의정부성모, 부천성모, 빈센트병원으로 확대 시행되고 있다.

또한 2006년 마취과의 진료표방과목이 마취통증의학과로 바뀌고 통증치료실이 활성화 되면서 현재 8개병원 모든 마취통증의학과에 통증크리닉이 개설되어 운영되고 있다. 특히 서울성모병원은 이전하면서 류마티스센터와 척추센터와 같은 공간 내에 위치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여 유기적인 협진체제가 이루어지면서 환자수가 급증하였다.